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7세 (문단 편집) === 실패한 수습 === 내분을 수습한 미하일 7세 정권은 [[1072년]], 동부 방어선의 구멍이 되어버린 [[소아시아]]의 [[카이세리|케사리아]](Kaisareia) 인근 통행로가 [[튀르크]] [[유목민]]들의 무리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최대 정예병인 [[타그마]]를 동원하여 이곳을 차단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남아있는 동부 금군 대부분이 모였다. 칼델리스(Kaldellis)는 그 수를 약 4천 명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이들은 도중에 대규모 튀르크군을 만나 수적 열세에 밀려 격파당했다. 1074년에는 다시 한 번 이를 시도하였다. 이번에는 수가 훨씬 줄어서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며 [[노르만]] 용병대가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노르만 용병대가 부대를 이탈하면서 군대는 흔들렸고 결국 상가리오스 강을 건너는 좀포스(Zompos) 다리에서 벌어진 노르만 군대와의 전투로 붕괴되었다. 이후로 동로마의 동부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꾸려 작전할 수 있는 금군 부대는 완전히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이탈한 [[노르만]] 용병대는 [[프랑스 왕국|프랑스]] 바이욀(Bailleul) 출신의 [[루셀 드 바이욀]]이라는 지휘관의 영도 아래 있었다. 루셀은 동족인 노르만족들이 남이탈리아에서 자립한 것을 기억하며 소아시아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좀포스 전투에서 동부 타그마를 와해시킨 루셀은 동로마에 고용되어 있던 프랑크 용병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총 3천에 달하는 기사대가 모두 모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스포루스 해협|바다]] 건너편에서 무력 시위를 하자 무력한 미하일 7세는 깊은 굴욕감을 느끼고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루셀을 파멸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몰락을 본격적으로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1072년]] 이후 셀주크 튀르크 제국 본토와 외교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또한 소아시아 각지의 튀르크 유목민 일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로마 정부는 아예 루셀이 영토를 강탈해간 아르메니아콘(Armeniakon)에 [[이이제이|튀르크 유목민들을 유입시켜 루셀을 견제하려고까지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루셀을 사로잡기 위해 2년 전 총사령관에 취임시킨 [[알렉시오스 1세|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변변한 병력도 없이 투입하기까지 했다. 갖은 고통 끝에 알렉시오스는 루셀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뒤에 남겨진 아르메니아콘 지방은 사실상 튀르크 유목민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물론 [[1079년]] ~ [[1080년]] 초까지도 동로마 정부는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까지 행정관을 지명하며 여전한 통치력을 행사하기는 했다. [[유튜브]] 지도 동영상류에 나오는, 동로마의 영토에서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패배 이후 [[아나톨리아]]의 서부[* [[에게 해]] 연안]와 북부[* [[흑해]] 연안] 해안만 남고 나머지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그렸을 뿐 실상과는 다소 다르다.) 한편 치세 초기 미하일 7세 정권을 지휘한 것은 시디(Side)의 주교였던 요안니스였다. 하지만 당시 제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인품과 덕망보다는 현실 감각이었다.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엘라도스(Hellados,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 행정 장관을 지내던 니키포로스(Nikephoros)가 서서히 실권을 잠식하며 요안니스 주교를 몰아냈으며 부황제 요안니스 역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후 그는 강경한 정책을 밀어붙이며 재건을 시도했다. 전반적인 물자 부족으로 화폐 경제가 악화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인상하였고 새롭게 [[불사 부대]](Athanatoi)를 재건했다. 불과 18세였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서부군 총사령관에 봉한 것도 그의 안목이었다.[* 물론 이는 파플라고니아 군부와의 연계를 꾀하여 위협적인 [[카파도키아]] 군부를 견제하고자 했던 목적이 더 크긴 하다.] 하지만 혹독한 세금 정책은 반발에 부딪혔다. [[1074년]], [[다뉴브 강|이스트로스 강]] 연안에서 유목민들과 섞여 살며 상당 부분 세제 혜택을 보고 있던 저지대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부는 [[네스토르(반란자)|네스토르]](Nestor)를 지휘관으로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오히려 네스토르까지 반란군에 결탁하며 한때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미하일 7세를 압박하여 니키포로스를 실각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군대를 물려 북방으로 후퇴했다. 비록 직접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던 사건이었으나 이 반란으로 북방의 유목민 방어선은 다시 무너졌다. [[1076년]]부터는 재차 남하한 [[페체네그]]와 여러 유목민들이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등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서부 타그마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부대가 [[아드리아노플]]에 있었지만 최후의 정예 부대라는 점 때문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